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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시민사회단체에서 아카이브를 만든다는 것: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 구축 사례 Building the Archives in a Civil Society: ‘The Archives of 1997 Korean Financial Crisis’
  • 비영리 CC BY-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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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시민사회단체에서 아카이브를 만든다는 것: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 구축 사례
ABSTRACT

This paper introduces the process in which the Center for Freedom of Information, founded for the public’s right to know by disseminating public information, was created <Archives of 1997 Korean Financial Crisis>. Building archives with scarce resources and capacities has resulted in a number of troubles and frustrations, and the need for reorientation. However, through the contributions of many people empathizing with the unique needs and meanings of citizen-led archives, difficulties were overcome, and archives were built. This paper summarizes the specific difficulties and capabilities required in this process, especially the knowledge and assistance needed in the field of records management. Although much research is necessary, the archives serve as an example of remembering and reconstructing the past when the 1997 Crisis Archives had shaken all the foundations of people’s lives, and a tool to guide decision-making.

KEYWORD
민간 아카이브 , 시민단체 , 아카이브 구축 ,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 , 1997 외환위기
  •  

    2019년 9월, 많은 사람들에게 ‘IMF’로 일컬어지는 1997년 외환위기의 기록을 모은 아카이브가 웹 공간에 만들어졌다. 딱히 기념일도 아닌 애매한 시기에, 경제 관련 학술단체나 전문가 집단도 아니고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1)’라는 시민단체가 만든 아카이브였다.

    1. 정보공개센터가 외환위기 아카이브를?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2)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경제 분야와는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시민단체가 본인들이 생산한 기록을 아카이빙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굳이 ‘외환위기’라는 사회경제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여기저기서 수집하여 주제 아카이브를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해 종종 질문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원래 국가기록원 등의 공공기관에서 했어야 하는 사업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일단 ‘왜’ 아카이브를 만들게 되었는지 이야기하자면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두 번째, 시민단체가 주도하여 만들고 운영하는 주제 아카이브가 고유의 필요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아카이브의 상이나 목표를 매우 유연하게, 최소한의 수준으로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물리적인 공간이 없는 웹 아카이브를 구상했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생각했다. 웹 아카이브의 경우 DB나 사이트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많이 보급화 되었으므로 단체의 재정 안에서 소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정 안되면 구글이나 깃허브, 블로그 등 기존의 플랫폼들을 이용해서 어떤 형태로든 운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말하자면 날이 갈수록 웹상에서 더 쉽게 컨텐츠를 만들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 환경적 조건이 ‘실용파’인 우리에게 비빌 언덕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라는 시민단체의 특성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정보공개센터는 “공공정보의 대중화를 통해 시민의 알 권리를 실현하고 사회 전반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시민사회 단체로, 운영위원 및 후원회원의 상당수가 기록전문가였고, 언론인이나 개발자 등 기록에 대한 분석이나 사이트 구축과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자문과 협업을 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실제로 정보공개센터에서 외환위기 관련 기록수집의 구상이 가능했던 것은 기록전문가 회원을 통해 국제기구의 비밀해제가 20년 주기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고, 아카이브 구축에 대한 고려 이전에 ‘한국 사회의 주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공개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기록수집을 먼저 진행했다. IMF에 대한 비밀해제 요청은 정부기관의 협조 요청이 별다르게 필요하지 않았고 메일을 통해 연구계획서를 보내면 누구나 진행할 수 있었다. 또 2017년 당시 정책상으로는 비밀해제 작업 후 직접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파일로 모든 자료를 변환하여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개인이나 소규모 시민단체가 비밀해제 요청을 진행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두 번째 ‘시민 차원에서 만들고 운영하는 아카이브가 공공기관의 역할과는 상관없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어떤 아카이브를 만들 것인지 구체적인 상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 명확해졌다. 민간재단의 지원사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별도로 만들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한 후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기록수집의 범위와 활용 가능한 역량이 구체화 되었다. 당초의 예상과는 다르게 IMF기록의 비밀해제가 1년 이상 지연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목록작업을 하는 대신 기록 수집대상을 크게 넓혀 기록수집을 진행했다. 외환위기와 관련한 다양한 의제와 형식의 자료를 기관 구분 없이 최대한 모았고, 정치경제의 주요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도록 주제 분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자문을 위해 외환위기와 관련한 연구를 진행했던 연구자, 기자, 작가, 활동가 등을 만났고, 기록 이외에 사건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소개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한편 연구 기초자료를 기증받을 수 있었다. 주제분류와 콘텐츠 기획을 하면서, 아카이브 역시 특정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렇기에 민간 영역에서, 시민 그룹이 만드는 아카이브가 고유의 관점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아카이브의 목표는 외환위기와 관련한 정보의 구심점이 되는 것, 그리고 ‘IMF 위기’가 시민들의 관점에서 더 많이 이야기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되었다.

    2.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의 구축 과정

    앞선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듯, 외환위기 아카이브는 많은 좌충우돌과 좌절, 그에 따른 방향의 수정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졌는데, 개략적으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실제로 구체적인 자료수집과 아카이브를 기획한 것은 2017년부터로, 약 2년의 기간을 거쳐 현재의 아카이브가 구축되었다.

    [<표 1>] 아카이브 구축 주요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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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이브 구축 주요 경과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은 1) 기록 수집 및 전자화, 2) DB작업, 3) 콘텐츠 생산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고, <표 2>와 같이 각 작업의 특성에 따라 협업 및 논의 단위가 구성되었다.

    [<표 2>] 아카이브 작업 수행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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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이브 작업 수행 단위

    아카이브가 만들어지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리게 된 것은 IMF에서 자료 송부가 늦어졌지면서 아카이브의 성격과 우선순위를 고민하고 재설정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작업의 진행이 늦어진 것에는 시민단체의 활동 인력이 한정적이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정보공개센터 역시 5명의 활동가가 정보공개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에 대해 고유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업 중의 하나로 아카이브 구축을 진행했기 때문에, 아카이브 작업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물론 외환위기 아카이브의 경우 단체 내에서 아카이브를 매우 주요한 사업으로 함께 인식하고 있었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담당 활동가들의 의견과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조직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산 분배에서의 고려, 기본적인 운영업무의 분장, 아카이브와 관련한 실무나 홍보 업무 지원 등이 없었다면 아카이브를 내놓기까지 시간은 더 길어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담당 활동가가 아카이브만 담당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발생하는 이슈나 기한이 촉박한 일을 먼저 처리 하다보면 아카이브 업무는 후순위로 밀려나기가 너무 쉬웠다.

    예산의 투입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아카이브 구축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이었다. 소규모 단체에서 수천 만원 단위의 사업을 자체 예산으로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별도의 웹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종 재단의 공모사업을 통해야만 했다. 하지만 2월부터 11월, 10개월 주기로 돌아가는 공모사업의 사이클은 작업량 자체가 다방면으로 많고, 자료수집, 사이트 개발, 콘텐츠 작업 모두에서 시일이 늦어질 가능성이 상존하는 아카이브 사업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연속지원을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한 공모지원 시업은 예산 규모가 대부분 5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이기 때문에 별도의 아카이브 사이트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적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작업을 진행할 때 부딪치게 되는 구체적인 난관은, 할 수 있는 것과 욕심 사이의 괴리를 좁히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이었다. 완벽한 목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지 (사실 목록의 완성도를 어디까지 두어야 할지 자체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관계정보를 완벽하게 기입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OCR 작업에 매진해 자료의 활용성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지, 의미 있고 멋있는 콘텐츠를 통해 시민들과 접점을 늘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지 시간은 없고, 몸은 하나인데 도통 감이 오지 않아 이것저것 다 부족한 상태로 오픈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고심하고 고심하여 주제 분류의 값을 정하고 분류를 진행했지만, 자꾸만 새로운 주제의, 애매한 분류의 기록이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분류를 추가할지 어떤 분류에 추가할지 고심하고 재작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비교적 동시대적 사건의 주제 아카이브를 만들다보니 사진이나 영상을 아카이브에 이용할 수가 없어 메인 페이지를 구성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출처가 명확한 보도사진들을 포함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공공기관이 서비스하고 있는 사진들도 모두 엄격한 저작권 정책을 가지고 있었고, 아카이브에서 안정적으로 이용하려면 사진 한 장당 1년에 10만원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공공기관의 아주 오래된 사진이나 협의가 가능한 신문사의 사진을 위주로 최소한의 자료만 찾아 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구자가 기증한 방대한 양의 기사 스크랩 자료들 역시 저작권 문제로 공유할 수가 없어, 비공개로 등록하고 자료 열람을 안내하는 방법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비영리 목적의 아카이브에 대해 공정이용 적용을 가능하게 하거나 역사자료에 대한 오픈 액세스를 확대하는 등의 제도적 개선이 매우 시급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3. 아카이브에 필요한 전문가의 도움

    전반적으로 역량과 자원이 부족한 시민단체에서 아카이브를 만들고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활동가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있었고, 부족한 부분들을 외환위기 아카이브의 취지에 동감하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영역들이다.

     

    • 기록관리: 기록 수집을 위한 자문, 모아진 기록에 질서를 부여하고, 데이터화 함

    • 사이트 개발, 디자인: 아카이브의 실체

    • 법률자문 및 대응: 수집기록의 저작권, 초상권 등 검토

    • 분야연구: 콘텐츠생산, 해설등

     

    이 중 특히 기록관리 전문역량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DB 메타 데이터 설정하기

     ▶ 각 기록을 어떤 값으로 분류하고 검색하게 할 것인지 아카이브 및 자료의 성격에 따라 함께 논의 필요

     ▶ 공동작업을 위한 기술규칙 컨설팅

     

    2. 지속가능한 아카이브를 위한 가이드

     ▶ 수집정책, 기증정책, 이용정책에 대한 개념 설명과 예시 제공

     ▶ 정리와 기술, 분류, 평가, 전시, 등록등 실무 단위에서 필요한 지침 마련

     

    3. 기존 아카이브들의 사례 제공

     ▶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기능을 새로 구축하기는 어려우므로 활용할 수 있는 선례들을 최대한 많이 볼 수 있도록 안내가 필요함

     ▶ 규모에 맞게 최선의 방안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아카이브의 형태를 발굴하고 제시

     

    외환위기 아카이브의 경우, 정보공개센터 외에도 수많은 시민 아카이브를 지원하는 ‘아카이브랩’에서 대부분의 도움을 받았다. 이외에도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많은 기록관리 전문가들, 외환위기 아카이브의 필요와 의미를 높이 평가해준 연구자들과 자원활동가들, 시민들의 크고 작은 기여로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가 만들어졌다.

    한편으로는 매우 애석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공동이 기여한 작업과정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록과 질문이 모여, 더 나은 미래를 낳을 수 있도록

    2019년 9월 오픈한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에는 총 5,300여건의 자료가 1차로 등록되었다. IMF측 자료와 기획재정부가 보관하던 일부 자료들이 2020년 중 등록될 예정이다. 여전히 한국정부가 처음 구제금융을 논의한 한국은행의 보고서, 협상 당시 재정경제원에서 생산한 60철 분량의 공문 등 많은 주요 기록들이 보존되지 않거나 비공개되어 시민에게 공유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비밀해제 요청과 수집 작업도 끝나지 않았다.

    한편, IMF구제금융과 이로 인한 극심한 불황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대응했는지, 평범한 시민들의 기록들 역시 많지 않다. 기왕에 시작했으니 IMF시기를 살아온 시민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구술 채록을 진행 중이다. 물론 IMF시대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다른 콘텐츠들도 계속해서 발굴할 예정이다.

    지주형은 IMF와 한국사회의 변화를 분석한 그의 저서4)에서 프랑스 철학자 드브레의 말을 인용한다. “위기의 해법은 사물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오랫동안 규정한다.” 외환위기의 기록들은 한 사회의 경제가 절대 수학적 계산으로 예측되지도 않고, 우리 생각만큼 저절로 흘러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은 결국 사회적 결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직 방문자 수는 2천명 남짓이지만 <1997 외환위기 아카이브>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었던 과거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좋은 사례로서, 그리고 더 나은 결정들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도구로서 오래 기능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 1. (2011)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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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1> ]  아카이브 구축 주요 경과
    아카이브 구축 주요 경과
  • [ <표 2> ]  아카이브 작업 수행 단위
    아카이브 작업 수행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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