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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A 학술지
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의 조선어 교육방식 연구* -「復文錄」의 분석을 통해-
  • 비영리 CC BY-NC
ABSTRACT
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의 조선어 교육방식 연구* -「復文錄」의 분석을 통해-

Jinwan Park. 2015. A Study of the Korean language education in the Cho-ryang-gwan-eo-hak-so (草梁館語學所) : from the method of analyzing the Bok-mun-rok (復文錄). Journal of Korean Language Education 26-2: 97-124. The Bok-mun-rok (復文錄) is a compilation of diaries and answer sheets written by Nakamura Shojiro (中村庄次郞). It is possible to see the educational method of Korean language composition in the Cho-ryang-gwan-eo-hak-so (草梁館語學所) by analyzing the content of the Bok-mun-rok. The remarkable characteristic is that retranslation (復文) education was implemented in the composition class. The process of retranslation was as follows. Firstly, the professor prepared the original Korean sentences and translated Japanese sentences. Students retranslated those Japanese sentences into Korean sentences, and then submitted an answer sheet to the student representative (監佐). Secondly the student representative determined right and wrong answers by comparing an the answer sheets with the original Korean sentence, and corrected wrong answers initially. The professors also corrected some mistakes which were not corrected by the student representative. The types of corrections made to the sentences varied widely from spelling mistakes in particles and endings, to honorific expressions and sentence structure. Finally that results of the corrections were returned to the students. From the point of Korean language education history, the Bok-mun-rok can be considered not only the first manuscript recording examination questions and test results, but also the first record of corrections on the Korean language composition education for Japanese students in 19th century. (Kyoto Sangyo University)

KEYWORD
교육법 , 작문교육 , 첨삭 , 복문 , 초량관어학소
  • 1. 서론

    도쿄대학(東京大學) 언어학연구실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는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가 쓴 「復文錄」 2책이 전한다.

    기존 연구에서 「復文錄」은 오구라문고 소장본을 개관하는 과정에서 간단히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우선 小倉進平(1934:72)은 본서에 대해서 매달 몇 번씩 교수가 일본어 문장을 제출하여 그것을 번역한 연습장이며, 책 중에 주서(朱書)가 있는 부분은 교수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후쿠이 레이(福井玲, 2006:1604)에서는 본서를 작문 연습을 위한 것으로 보고, 본문에는 한국어로 된 문장을 고친 경우와 일본어 번역문을 고친 두 가지의 경우가 있으므로, 일한 번역과 한일 번역이라는 두 가지의 과제가 주어졌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復文錄」은 번역 연습장 혹은 작문 연습을 위한 책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본서의 서사 목적과 활용 방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바는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우선 「復文錄」의 성립 과정과 자료성을 살피고, 본서에 수록된 기사 내용을 분석하면서 복문(復文)에 의한 조선어교육과 평가가 어떤 방식으로 실시되었는지 고찰한다. 아울러 초량관어학소(草粱館語學所, 1873~1880)에서 실시한 조선어 작문교육의 내용과 특징을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묵서(墨書)와 주서(朱書)로 교정된 내용을 통해 첨삭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한다.

    2. 자료 소개

       2.1 저자와 서지

    쓰시마(對馬島)의 조선어통사(朝鮮語通詞) 교육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건의에 의해 이즈하라(嚴原)에 설치된 ‘韓語司’(1727)가 그 시초이며, 이때 형성된 조선어 교육방식은 이즈하라 한어학소(嚴原韓語學所, 1871~1873)로 계승된다.1) 그러나 설치 1년만에 운영상 어려움을 겪게 되자 어학소를 초량왜관(草粱倭館)으로 옮기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계획은 쓰시마번(對馬島藩)을 대신하여 대조선 외교를 담당하게 된 메이지(明治) 정부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서, 대조선 무역과 표류민 송환과 같은 교섭 실무를 맡길 수 있는 계고통사(稽古通詞)를 양성하기 위해 어학소를 초량으로 옮기고, 이에 수반하는 규약의 제정, 교수의 임명, 대내외적 활동 지시 등 운영 전반은 외무성(外務省)이 담당했다.2)

    이전이 완료된 1873년 10월에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로 개칭하고, 아라카와 도쿠시게(荒川德滋) 교수와 타바타 이라(束田伊良) 조교, 스미나가 유스케(住永友輔) 조교의 3명에게 교육을 맡겼다.3)

    그러나 아라카와 교수가 경질(更迭)된 이후 1874년 6월부터 우라세 유타카(浦瀨裕) 교수와 스미나가 유스케(住永友輔) 조교의 이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스미나가 조교는 이즈하라 한어학소때부터 교육을 담당한 경험(1871.10.25.∼1872.9.30)이 있었고, 1874년 6월 3일부터 초량관어학소에 재차 부임하였다.

    이를 통해 초량관어학소의 교사진에는 과거 교사 중의 일부가 차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전을 전후한 어학소의 교수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의 직제 중 최상위직인 독장(督長)은 어학소의 운영을 총괄하고 교육 내용을 감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 후기에는 오쿠 요시사다(奧義制)가 독장(督長)을 맡았다.

    [<표 1>] 어학소의 교수진(「朝鮮事務書」의 辭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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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학소의 교수진(「朝鮮事務書」의 辭令 참조)

    초량관어학소에 파견된 계고통사 겸 어학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에는 당시 연령을 기재한다.

    (1) 학생명단

    초량관어학소로 파견된 계고통사는 이상의 10명으로서 당시의 나이는 17~28세였다. 자료 (3)의 ‘語學所의 級制’를 참조하면, 등급은 총 6등급으로서 제1급과 2급, 그리고 6급은 해당자가 없고, 제3급과 4급이 세 명씩, 제5급이 네 명 있었다.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 이하 나카무라)의 등급은 제3급의 두 번째로서, 전체 10명 중 2위의 실력이었다. 그런데 1875년 7월 29일에 작성된 나카무라의 이력서5)에는 ‘一級生 明治九年七月十九日 中村庄次郞’으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어학소에서 수학한지 2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 이미 최고 등급인 제1급으로 승급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어학 실력 증진에 일조한 것이 바로 어학소에서 실시한 복문(復文) 교육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서의 서지와 내용에 대해서는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자필 기록 「中村庄次郞 寄贈書目錄」6)의 설명이 참조된다.

    (2) 中村庄次郞 기증서목록 중 「復文錄」 항목(필자 번역)

    현재 두 책이 소장되어 있으며 (2a)의 도서번호 L174712에는 표지에 「復文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2b)의 도서번호 L174713은 가제(假題)로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후쿠이 레이(福井玲, 2011)의 <부록 2> 「오구라문고 목록」에서는 양자를 동일한 책으로 보아, ‘復文錄(L174712-3) 明治6,8年(1873,5), 寫本, 2冊, 24.3×16.6cm, 假綴, 識語(卷末, 小倉):「中村庄次郞翁より寄贈/昭和七年(1932)八月 進平」으로 기록하고 있다.

    (2a,b)는 크기나 면수는 물론, 본문의 기술 형식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에서, 두 책을 동일서로 취급하는 것은 타당한 견해로 생각된다. 다만 기사의 작성 시기를 검토하면 (2b)가 (2a)보다 시대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L174713을 권1, L174712를 권2로 설정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中村庄次郞 寄贈書目錄」에서는 본서의 성격에 대해 (2a)의 ‘조선어 문장을 만드는 연습’ 혹은 (2b)의 ‘일지(日誌) 형태’라고 지적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작성되고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달려 있지 않다.

    본서의 자료성을 논의할 수 있는 단서로서 우선 (2b) 권1의 본문 첫머리에 쓰인 역문(譯文)이라는 용어, 그리고 (2a) 권2의 앞표지에 쓰인 복문(復文)이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복문(復文, retranslation)은 한번 모국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원래의 외국어로 재번역하는 방법을 말한다. ‘원문(原文)→역문(譯文)→복문(復文)’의 단계를 거쳐 실시되었으므로, 권1의 역문은 복문 교육의 첫 번째 단계를, 권2의 표지에 적힌 복문은 두 번째 단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복문은 에도시대의 한문 교육에서 이미 사용된 용어로서, 일본어 훈독문(訓讀文)으로부터 원래의 한문을 복원함으로써 한문과 일본어 사이의 어순 불일치와 어휘 오용과 같은 이른바 일본식 한문투(=和習)의 발생을 막기 위해 고안된 작문 교육의 한 방법이다.7)

    메이지(明治) 시대에 들어 복문에 의한 교육은 복역법(復譯法)으로 이름을 바꿔 영어 작문교육에 도입되기도 했다. 古賀圓太(1933:152)는 메이지 20년 전후의 중학교 영어교육에 대해 ‘원문의 일본어역을 다시 영어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유 작문(free composition)은 별로 없었고 처음부터 일문(日文)을 영역(英譯)하는 방식의 교수법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처럼 한문과 영어 작문교육에 활용되었던 복문(復文)에 의한 교수법을 조선어교육에 도입했다는 점은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다시 말해 초량관어학소에서는 복문을 이용하여 조선어 작문 교육을 실시했고, 「復文錄」은 그 결과물로서 권1의 117개조,8) 권2의 31개조를 합한 총 148개조의 기사는 모두 어학소에서 실시한 복문 교육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復文錄」에는 지어(識語)가 달려 있지 않으므로 필사 시기는 불분명하다. 각 기사의 서두에 기재된 날짜를 참조하면, 권1의 서두 제1~26조는 1873년, 제27조~117조는 1874년의 기록이다. 또 권2의 제118조~142조는 1875년, 제143조~148조는 1876년의 기록이다. 기사는 모두 날짜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양적으로 볼 때 1874년의 기록이 91개조로서 제일 많음을 알 수 있다.

    날짜를 명시한 첫번째 기사는 [제6조] 1873년 11월 12일이며, 마지막 기사는 [제143조]의 1876년 4월 18일이다. 따라서 복문 기록은 1873년 어학생들이 초량왜관에 도착한 전후에 시작되어, 계고통사로 활동하던 1876년 4월 18일 이후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의 작성 시기를 곧 「復文錄」의 성립 시기로 볼 수 있으므로, 본서의 성립은 1873년부터 1876년까지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권2의 앞표지에 ‘明治乃八年(1875) 秋八月送’이라고 쓰여 있어, 본서는 작성 도중에 어떠한 목적에서 누군가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4.2절에서 재론한다.

       2.2 성립 과정

    초량관어학소는「草梁館語學所の規定」<朝鮮事務書,권24:33a-35b>에서 정한 학과(學課)와 규정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3) 草梁館語學所規則書幷等級人名書 <朝鮮事務書, 권24:33a-36b>

    語學所の級制 <朝鮮事務書, 권24:36a-b>

    第一級 欠

    第二級 欠

    第三級 監佐 吉副喜八郞 / 中村庄次郞 / 淺山顯藏

    第四級 吉村平四郞 / 阿比留祐作 / 大石又三郞

    第五級 武田邦太郞 / 津江直助 / 武田甚太 / 黑岩淸美

    第六級 欠

    以上

    「學課」 조에 의하면, 오전 수업은 복독(復讀, 9-10시), 편문(編文, 10-11시), 회화(會話, 11-12시)의 순서로 구성된다. 이후 30분간 휴식을 가진 뒤, 오후 12시 30분부터 3시까지 새로운 부분을 학습하도록 되어 있다.

    규정4,5를 보면, 어학생은 수업 이외에도 당직의 의무가 있었다. 매일 순번대로 당직을 맡아 수업 환경을 정리하고, 당일의 사무와 잡무를 기록했는데, 이를 일기부(日記簿)라고 한다.

    특히 규정5에 따라 감좌(監佐)10)는 일기부의 내용을 교정‧보충해서 교수에게 제출하고, 교수가 이를 다시 정리하여 독장(督長)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일기부는 어학소의 공식적인 활동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초량관어학소의 감좌는 ‘語學所の級制’에서 ‘第三級 監佐’로 기록된 요시조에 기하치로(吉副喜八郞)였다.11) 감좌는 어학생의 대표로서 규정7,8에 의하면, 시험 실시 후의 채점 및 성적의 기록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어학생들의 답안에 대해 정오(正誤)를 판정하고, 채점 후에는 성적을 교수에게 보고했으며, 시험의 내용을 기록하고 관리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규정에 의하면 어학소의 내부 활동 기록으로서, 당일의 잡무와 사무 및 시사(時事)를 기록한 일기부와, 시험문제를 기록한 시험부(試驗簿)가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기부와 시험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으나,12) 이들 기록은 「復文錄」의 본문 내용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復文錄」에는 일기부와 관련해서 어학소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 및 사고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시험부와 관련해서 답안에 대한 감좌의 채점 기록 및 묵서(墨書)와 주서(朱書)에 의한 교정이 산견된다. 바꾸어 말하면 본서의 내용 분석을 통해 비록 실물 그 자체는 아니지만, 초량관어학소의 일기부와 시험부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嚴原韓語學所의 연혁과 운영에 관해서는 大曲美太郞(1935)과 松原孝俊·趙眞璟(1997)이 참조된다.  2)‘稽古通詞常備’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朝鮮事務書」(권21:87a)를 참조. 「朝鮮事務書」의 원문은 영인본 韓國日本問題硏究會編(1971)을 참조했다.  3)이때 발급된 사령(辭令)은 다음과 같다. ‘「公館勤務辭令」奧義制。一代官兼務申付候事、同人稽古通詞督長可心得事、明治六年十月御用所。山之城祐長別監申付候事、明治六年十月御用所。荒川德滋幹傳官申付候事、同人稽古通詞敎授申付候事。束田伊良⋅住永辰采、荒川德滋差支之節ハ助敎可心得事、明治六年十月御用所’<朝鮮事務書, 권24:31a-b>.  4)이즈하라 한어학소의 초대 교수 히로세 나오유키(廣瀨直行)는 어학소에서 일어난 소요로 곧 경질되었기 때문에 1872년 10월부터 荒川德玆 조교 1인이 교육을 담당하는 체제가 된다(「朝鮮事務書」 권15:92a-b 참조).  5)이력서는 ‘生徒理學調書’(「宮本大丞朝鮮理事始末」권6)에 수록되어 있다. 어학소의 별감(別監) 야마노죠 스케나가(山之城祐長)가 경성(京成)의 미야모토 이사관(宮本理事宮)에게 보낸 서신중에 포함되어 있으며, 어학생의 재적 기간과 함께, 병결과 귀향 일수를 뺀 총 수학 일수가 기록되어 있다. 재학 중의 수학 자금도 ‘사비/관비’로 구별되어 기록되었다. 같은 책(권6:58a-b)에 수록된 나카무라의 이력서에는 그가 1872년 11월 계고통사로 임명된 이래 32개월 19일간 관비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후쿠이 레이(福井玲, 2011:252-255)의 <부록 1> 「中村庄次郞 寄贈書目錄」을 참조하면, 기증서는 총 30여 책에 이르며, 내용상으로 조선의 언어와 문화, 역사에 관한 것이 많다.  7)복문을 통한 한문학습법에 관해서는 이토 도가이(伊藤東涯)가 편찬한 「譯文法式」(1701, 「文林良材」 首)이 참조된다. 이에 의하면 에도(江戶)시대의 유학자 伊藤仁齋(1627~1705)가 복문(復文)을 최초로 고안했다(李長波, 2002:54).  8)본고에서는 복문 연습을 위한 1회분의 기록을 한 조(條)로 파악한다.  9)규정은 총 11개조로 되어 있으나, 지면의 제약 상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보인다. 해석의 편의를 위해 일본어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다.  10)감좌의 선출에 관해서는 ‘전원 중에서 품행이 단정하고 어학에도 뛰어난 자 2명 중에서 입찰 방식으로 선거하여 학교내의 감좌로 삼을 것’(一、全員中品行端肅且語學ニモ上進セルモノ二名ヲ入札ヲ以テ選擧シ、之ヲシテ校中ノ監佐タラシムへシ。「朝鮮事務書」 권15:68a)이라는 기사가 참조된다.  11)「復文錄」에는 요시조에 기하치로(吉副喜八郞)와 관련된 기사로서, [제40조]<1:21b>에는 1874년 그를 위시하여 초량관어학소 학생 6명이 왜관을 출발하여 嚴原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12)田阪正則(2010)은 어학소 출신 계고통사(稽古通詞)의 활동을 분석한 논문으로서, 같은 책(2010:219)에서는 (3)에서 언급한 「朝鮮事務書」의 규정5,7을 통해 어학생이 작성한 일지와 시험부가 존재할지 모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3. 복문 교육의 방법

    「復文錄」은 조선어에 대한 일본어번역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현전하는 쓰시마(對馬島)의 조선어학습서류와 비교하여 외견상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복문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본서에 수록된 일본어문장은 원문(原文)에 대한 역문(譯文)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는 것이고, 조선어문장은 역문을 조선어로 재번역(=복원)한 문장, 즉 복문(復文)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관계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복문 교육은 크게 준비 단계와 실시 단계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교수에 의한 준비 단계는 29엽과 30엽 사이에 삽입된 괘선(罫線) 용지 1매를 통해 그 대략을 추정할 수 있다.

    <도판 1>은 복문 과제의 원안으로 추정되는 것으로서 본문의 글자체와는 판연히 다르며, ‘十九日 敎授’라는 서명(署名)이 있음을 통해 볼 때 이는 초량관어학소의 교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판 1>의 오른쪽 면을 통해 복문 교육의 실시 과정을 추정해 보면, 우선 교수는 하루에 학습할 만한 분량으로 약 80자 정도의 원문을 추출한 뒤 이를 번역한 역문을 준비한다. 그다음 별도의 용지에 문제를 기입해서 어학생에게 배부하면, 어학생들은 일본어역문을 보고, 조선어로 복원하는 연습을 시행했을 것이다.

    한편 <도판 1>의 왼쪽 면에는 조선어원문과 일본어역문이 동시에 쓰여 있으므로, 이상과는 다른 방식, 즉 교사가 역문을 읽는 사복문(射覆文)의 방식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3)

    사복문은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영어학습법에도 채용되어, 실제로 Standard Choice Readers(1904) 제3권에는 매과마다 복문 연습이 있어서, 교사의 일본어 번역을 듣고, 학생이 다시 영어로 번역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조선어교육에도 사복문이 채용되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復文錄」을 통해 교수의 준비 단계로서 원문(①조선어)과 역문(②일본어), 실시 결과로서 어학생이 작성한 복문(③조선어)과 번역문(④일본어)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바, 복문 교육의 실시는 역문을 보거나 혹은 음성으로 실현된 역문을 듣고 이를 다시 원어로 복원하는 방법으로 실시되었던 것이다.

    교수의 수업 원안에 해당하는 <도판 1>이 어떤 경위로 「復文錄」의 책장(冊張) 속에 남겨지게 된 것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그 내용을 통해 복문 실시의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복문의 답안에 해당하는 「復文錄」의 기사 중에는 답안을 작성한 어학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하 「復文錄」의 문장을 인용할 시에는 괄호 속에 권수, 엽수, 앞뒤(a/b)의 순서로 보이고, 엽수는 조선어가 시작하는 부분을 기준으로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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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조]의 날짜 밑에는 나카무라의 서명(署名)이 기재되어 있으며, 제50조에서 제68조(1:25b-34a)까지는 기사의 첫머리에 ‘中村’의 도장이 예외 없이 찍혀 있다. 아울러 전체 148개조의 필체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을 통해 볼 때 권1과 권2에 수록된 문장은 모두 나카무라 개인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도판 1>에 대한 나카무라의 복문 결과는 [제17, 18조]<1:7b-8b>에 실려 있으므로, 원문, 역문, 복문의 내용을 서로 비교하면서 실제로 복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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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1>의 탈초문과 (5)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원문과 복문 결과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을 들면, 밑줄 친 부분과 같이, 2인칭 대명사 ‘너도→네’, 연결어미 선어말어미 의 세 군데이다.

    원문과 복문에 쓰인 조사와 어미 표현은 당시 모두 교체 가능한 형태로서 어느 쪽을 써도 문맥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결국 (5)의 복문 결과는 <도판 1>의 원문과 거의 흡사한 내용으로 복원되어 있으므로, 이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때 <도판 1>의 일본어역문과는 다른 제2의 일본어 번역이 존재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5)에 부기(附記)된 일본어는 복문 결과를 다시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최종적으로 또한번의 번역 연습을 시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5)의 일본어는 <표 2>의 ④, 즉 복문 교육의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표 2>] 복문 교육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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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문 교육의 개요

    한편 <도판 1>의 오른쪽 면에는 조선어원문이 없고 단지 일본어역문만 제시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나카무라의 복문은 [제17조]로서, 누군가에 의해 주서(朱書)로 교정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이하 <도판 2>를 탈초하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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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서로 대폭 수정한 곳을 검토하면, <도판 1>의 역문 4행 ‘冊上ノ誦讀大ニ拙ナリト歎シ’에 해당하는 표현은 ‘冊上의 이를 중선으로 삭제한 뒤 ‘冊上의셔 로 교정했다.

    수정문에는 나카무라가 복문하지 못해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에 이 채워져 있으며, (誦讀)로, ‘우음’이 ‘우슴’(笑)으로 고쳐지는 등, <도판 1>의 역문에 맞추어 조선어 표현이 대대적으로 교정되어 있다. <도판 1>에 쓰인 교수의 서명을 상기하면, (6)에 기재된 주서는 모두 교수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復文錄」에 수록된 기사는 모두 어학소에서 실시한 복문 교육의 결과물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다만 기사의 수록 형식에서 권1과 권2는 서로 차이를 보이는 바, 권1에는 조선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기재된 반면, 권2에는 단 1개조(제140조, 17a-18a)를 제외하면 모든 기사가 조선어로만 되어 있다.

    「復文錄」이 기본적으로 나카무라 개인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상기하면, 이는 <표 2>에서 제시한 복문 실시의 최종 단계에서 일본어 번역을 붙였는가, 아닌가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권1의 경우 복문의 결과인 조선어(③)와 그에 대한 일본어 번역(④)이 동시에 기재된 데 반해, 권2에서는 기본적으로 복문의 결과(③)만 싣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일본어 번역을 기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서, 우선 권1의 1엽에서 8엽까지(제1~18조), 그리고 권2의 17엽에서 18엽까지(제140조)는 조선어 문장의 우측에 작은 글씨로 일본어 번역을 붙이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조선어와 일본어의 어순 일치를 이용한 일대일 대역(對譯)으로 파악된다. 그 외에는 모두 조선어가 끝난 다음에 행을 바꾸어 번역을 달고 있다.

    한편 복문 과제로 제시된 양을 보면, <도판 2>의 우측면은 84자, 좌측면은 80자로서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復文錄」의 전체 기사를 대상으로 조사 범위를 확대해 보면 실제로는 좀더 많은 분량이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문 과제의 1행당 문자수는 권별, 기사별로 약간 차이를 보인다. 전체적인 양상을 보면, 권1의 1조~31조<1:17a>는 1행당 문자수가 16자, 32조에서 권2의 첫번째 기사인 118조까지는 20자인데 반해, 권2의 119조~148조는 21자에 맞춰져 있다.

    권1의 경우는 평균 6행이므로 약 100자 정도의 원문이 제시되어 있는데 반해, 권2는 평균 10행으로서 약 210자 정도로 길어지는 경향을 보인다.14) 후기로 갈수록 과제가 길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바, 이는 복문 교육의 난이도를 높인 것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13)사복문(射覆文)을 이용한 한문 작문 교육에 관해서는 李長波(2002:61-63)를 참조.  14)글자수에 관해서는 각 기사별로 미세한 차이를 보일 수 있고, 최초 단계에서 제시된 조선어원문과 최종 단계에서 복원된 조선어복문 사이에서도 서로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상의 수치는 복문의 1행당 문자수를 기준으로 평균치를 산출한 결과이다.

    4. 복문 교육의 실제

       4.1 시험과 평가

    초량관어학소의 복문(復文) 교육은 편문(編文)15) 시간에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一、每月十ノ日、午前第九時ヨリ至第十時ニ至ル?誦、第十時ヨリ至第十二時ニ至ル席上、編文・會話、此日、督長臨席試驗スベシ。

    학과(學課)에 관한 규정(예문 3)에 의하면,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수업을 받고, 또 (7)의 규정에 의해 매달 10이 붙는 날인 10, 20, 30일에는 10시부터 12시까지 독장(督長)의 참관 하에 편문(編文) 시험을 치렀다.

    ‘試驗’으로 명시된 (8a)는 어학소에서 실시된 복문 시험으로서 날짜 뒤에 기재된 ‘浦瀨’는 출제자인 교수 우라세 유타카(浦瀨裕)를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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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a)는 사자성어 ‘掩耳偸鈴(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다)’을 풀이하는 문제로서, 이에 대한 나카무라의 답안은 ‘可笑로운 말이올쇠’로 되어 있다.

    (8b)에도 시험문제와 답안이 실려 있는 바, 唐의 송지문(宋之問, 656?~712)이 지은 「下嵩山歌」 ‘下嵩丘兮多所思, 攜佳人兮步遲遲, 松間明月長如此, 君再遊兮復何時’(「萬首唐人絶句」 所收)에서 후구만 출제된 것이다.

    (8b)에서 교정된 부분을 보면, 행간에 ‘다 이제’가 묵서(墨書)로 쓰였고, 이와는 별도로 2행에 걸쳐 주서(朱書)로 조선어 문장이 기재되어 있다. 전자는 누락된 표현을 삽입하라는 지시이고, 후자는 한시의 의미에 보다 부합하는 해석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시험 실시 날짜를 보면, (8)은 둘 다 5가 붙는 날(6/15, 9/25)에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규정에 따라 10이 붙는 날에 시험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어떤 사정에 의해 원래 예정된 날짜와 다른 날에 실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다른 해석으로서 이즈하라 한어학소의 규정에 준해서 5가 들어간 날에 시험이 실시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로서는 ‘삼등 밖의 등급에 속하는 이에 관해서는 5와 10이 붙는 날, 즉 한 달에 여섯 번 시험을 쳐서 우열과 長短(실력)을 심사하여 다음 달의 진퇴를 정한다’(一、三等及員外ノ階級ヲ上下スルハ五ト十トノ日卽チ一月六回ノ試驗ヲ立テ優劣長短ヲ審判シ以テ月次進退ヲ表スヘシ。「朝鮮事務書」 권15:69b)는 기록이 참조된다.

    한편 ‘試驗’ 대신 ‘業’으로 기록된 곳도 보인다. 앞서 살핀 (6)의 [제17조](12월 19일)에서 교수는 내일 시험(明日 試驗)을 치른다고 공지하였고, 이하의 (9)는 그 다음 날인 12월 20일에 작성된 기사로서, 날짜 밑에 ‘業’으로 기록한 뒤 시험문제를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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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점 ●은 나카무라의 복문이 오답으로 판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수정전의 조선어 문장과 일본어역을 대조하면, ‘本州의셔’(本州より)와 (夜景迄ニハ)을 빠트렸으며, ‘到海船’을 ‘到泊船’으로 잘못 해독하는 등 전체적으로 실수가 많이 보이므로 오답으로 처리되고 있다.

    「復文錄」의 기사 중에서 ‘業’으로 표시된 곳은 (10)에서 든 총 12개조로서, 1873년은 12/10, 12/18, 12/20일, 1874년은 1/20, 1/31, 2/10, 2/20, 2/28, 3/10, 4/10, 4/20, 4/30일의 기록이 있는데, 1873년 12월 18일, 1874년 1월 31일과 2월 28일을 제외하면 모두 10이 붙는 날에 시험이 실시되고 있으므로, 어학소의 시험 날짜에 대한 규정 (7)과 대체로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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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어학소의 규정에 의해 복문 시험이 끝나면 그 답안(최종적으로 복문된 문장)과 원문을 상호 대조해서 정오를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10)에 든 바와 같이 복문 결과가 원문과 거의 일치하는 곳에는 흰색으로 권점을 쳐서(○ 표시) 정답으로 처리하고, 원문과 비교해 심각한 차이가 발생한 곳에는 검은색 권점, 즉 ●로 표시해서 오답으로 처리했다.

    (10)에는 정오(正誤) 표시가 없는 경우도 5회 포함되어 있으나, 나머지 7회의 시험 결과를 보면, 정답으로 표시된 곳은 2회(1874년 1/20, 2/10)뿐이며 나머지는 5회는 모두 오답(1873년 12/10, 12/20, 1874년 1/31, 2/20, 2/28)으로 처리되어 있다. 당시 나카무라의 조선어 실력이 어학소 내부에서 상위 2번째에 속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와 같은 결과는 예상밖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 복문의 평가 대상이 조선어와 일본어의 상호 번역과 같은 번역 기술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구어와 문어와 같은 조선어 원문의 문체 차이를 구별해서 복원하는 능력까지 평가 대상에 포함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예문 (6)에서는 로 각각 수정되어 있는데, 이상의 교정은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꾼 것으로 이해된다. 외국인으로서 이러한 문체 차이를 구별하기란 용이하지 않으므로, 결국 어학생들에게 복문(復文)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복문 교육의 지속적인 실시를 통해 장문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생들의 실력이 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지적한 대로 1875년 이후의 기록인 권2의 복문 과제는 권1에 비해 길이가 두 배 이상 늘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뒷받침된다.

    복문 교육의 효과로서는 우선 단계적 번역을 거치면서 조선어와 일본어 사이의 표현 차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점, 조선어의 표현상 특징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복문 과제로서 제시된 원문은 교수의 판단에 의해 교육적 효과가 높은 문헌에서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상의 복문 과제, 특히 시험 문제에 대한 내용 분석을 통해 어학소의 조선어교육에 대한 방향과 목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1)은 (10)의 기사 내용을 요약한 것인데, 학업을 독려하는 제53조 이외는 모두 어학소 외부에서의 통역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 복문 시험의 내용

    (11)은 거의 대부분 어학생들이 계고통사의 자격으로 조선측 역관과 직접 대화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이상의 기사는 모두 실제 대화 상황을 기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신임 사또(=東萊府使)의 부임을 알리는 [제50조](1874.4.20)는 「朝鮮事務書」 권26의 ‘四月十二日奧義制ヨリ來信’(奧義制로부터 온 서신) ‘신임 동래부사의 성명은 박제관이라 하는데, 부산 다대포도 교체되었을 것이나, 성명은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東萊府使新任ノ姓名ハ朴濟寬ト申候由、釜山多大浦モ交代ニ相成候得トモ姓名ハ未タ不承候.「朝鮮事務書」권26:24a)라는 기사와 내용상 서로 대응된다.

    이 문서의 발신자는 어학소의 독장(督長) 오쿠 요시사다(奧義制)였고, 수신자는 외무소승(外務小丞)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와 히로쓰 히로노부(廣津弘信)였다. 특히 발신된 날짜가 [제50조]의 작성 날짜보다 8일 빠른 明治七年(1874) 4월 12일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학생의 일기부(日記簿)가 교수를 거쳐 최종적으로 독장에게 제출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현지 사정에 대한 이상의 보고서는 어학생이 수집한 정보인 [제50조]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집된 정보가 정식으로 보고된 이후, 그 기사를 다시 복문(復文)의 소재로 사용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초량관어학소의 복문 교육은 통사(通詞) 양성교육의 일환으로서 통역 현장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조선어를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던 것이다.

    「復文錄」에 초량관어학소의 대내외 활동을 보여주는 기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본서의 기사 전체를 내용별로 나누면, 표류민 송환, 공무역, 구청(求請) 등 교섭과 요청에 관련된 내용이 가장 많고, 조선 국내외의 정세와 사건·사고를 조사·보고한 내용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그 외에도 조선 역관(譯官)과 사적으로 교제한 내용, 양반 및 평민과의 대화를 통해 민심을 시찰한 내용도 있다.

    또한 어학소 내부 활동으로서 시험문제가 14개조(예문8,10) 있고, 수업 관련 공지도 확인된다. 후자는 시험의 연기, 휴가의 실시, 신간(新刊)의 소개 등 조선어교육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復文錄」에 수록된 기사의 분석을 통해 어학생들의 대내외 활동을 직접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량관어학소의 일기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본서의 기사 내용은 사실에 의거하여 정확히 기재되었고, 수록된 기사 또한 원문과의 대조를 통해 철저히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復文錄」을 통한 일기부의 재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4.2 첨삭 교육의 실시

    복문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답안에 대한 첨삭(添削) 교육까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학생이 작성한 복문 결과는 적어도 2회 이상에 걸쳐 교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復文錄」에서 대치 가능한 표현이 제시되는 유형은 크게 세 가지로서 ‘四五日/ 又 數三日’<1:29b>, ‘急히 飛船을 보내시고/ 或 急送飛船시고’<1:43b>, ‘긋치 아닛게/ 일이 업개’<1:43b>’와 같이 ‘又⋯/ 或⋯/ (무표시)⋯’로 달리 나온다. 더욱이 같은 기사 내부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형식이 공존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통해 첨삭은 적어도 두 명 이상에 의해, 특히 (3)의 규정에 의하면 감좌(監佐)와 교수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감좌(監佐)는 시험 결과에 정오 판정을 하는 과정에서 틀린 부분에 대해 중선을 그어 삭제하거나, 빠진 어구를 삽입하는 등의 기초적인 수정을 가했다. 이에 대해 교수는 감좌가 빠트린 부분을 보충하고, 틀린 부분을 재수정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예문 (6)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교수에 의한 수정은 기본적으로 주서(朱書)로 표시되므로, 이에 대한 감좌에 의한 수정은 묵서(墨書)로 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예문 (12)에는 묵서와 주서가 겹쳐져 쓰인 곳이 있으므로 이러한 가설을 검증해 볼 수 있다.

    (12a)에서 해당 부분을 자세히 보면 묵서 위에 주서가 덧씌워져 있으며, <1:59b>와 같이 묵서로 된 수정을 지우고 주서로 재수정한 곳마저 확인된다.

    이는 감좌에 의한 수정을 교수가 재차 교정한 곳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교정의 선후 관계는 ‘묵서→주서’의 순이며, 결국 앞서의 생각대로 묵서는 감좌, 주서는 교수에 의한 수정이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서에는 묵서에 의한 일차 수정과 주서에 의한 이차 수정을 거친 기사가 산견된다. 1873년 기사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전체 26개조 중, [제9, 14, 16, 19, 20, 21, 24, 25, 26조]의 총 9개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권2의 앞표지의 기록 ‘明治乃八年(1875) 秋八月送’은 감좌의 초벌 수정을 거친 복문 결과가 교수에게 제출되어 이차 교정을 거쳤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어학소의 첨삭 교육에 대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표 3>과 같이 표현된다.

    [<표 3>] 첨삭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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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삭의 개요

    「復文錄」 전체를 통해 감좌에 의한 일차 수정으로서 요시조에 기하치로(吉副喜八郞)가 기재한 묵서가 산견되며, 감좌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수가 직접 교정한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첨삭한 교수의 실명이 기재된 기사 (12)가 실려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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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a)는 스미나가 유스케(住永友輔) 조교에 의한 첨삭 내용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해당 부분은 모두 주서(朱書)로 되어 있다.16) 여기에는 첨가예로서 주격조사를 보충한 ‘놈’가 있고, 삭제예로서 ‘계실진대’이 보인다. 수정예로서 ‘횟된말’을 ‘거즛말’로 고친 예가 확인된다. 이상은 모두 일차 수정 과정에서 빠트린 부분을 바로 잡은 것이다.

    또 (12b)는 우라세 유타카(浦瀨裕) 교수에 의한 첨삭 결과로서, ‘臨되’의 ‘-되’를 삭제하고 그 옆에 ‘-여도’로 수정한 뒤, 대치 가능한 표현으로 ‘-도록’을 제시하고 있다. 앞서 예문 (6)에서 로 고친 바와 같이, 이상의 교정도 문어체 어미를 구어체 어미로 수정한 것으로 파악된다.

    (12)의 예 이외에도 첨삭예로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한자어의 발음을 제시한 예(‘稱頉/칭탈’<1:33a>), 본디 한자를 명시한 예(‘죵/從此’<1:11b>), 이와 반대로 한자어에 대한 고유어를 제시한 예(‘初八日/여렌날’과 ‘火光/블빗지’<이상 1:41a>)를 들 수 있다. 이상은 한자어와 고유어에 대한 어휘 교육의 일환으로서 각각의 조선어에 대응하는 표현을 기재한 것이다.

    또 ‘是’(→亦是)<1:37b>, ‘啓狀’(→狀啓)<1:43a>와 같이 도치부호를 사용하여 어순을 바꾸라고 지시한 예가 보인다. 같은 한자를 쓰더라도 일본어와 조선어 사이에는 어순을 달리하는 한자어가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교정후의 어휘 ‘亦是’와 ‘狀啓’가 조선어로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차에 걸친 조선어 교정을 거친 복문은 어학생에게 되돌려졌으며, 어학생들은 자신이 틀린 부분과 교정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이를 일본어로 다시 번역하는 연습을 실시했다.

    예문 (13)은 복문 교육 과정상 최종 단계에 해당하는 일본어 번역(<표 2>의 ④)에서 잘못된 부분이 교정된 내용이다. 지면의 제약상 교정된 부분만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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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마자 오라’에 대한 번역으로 원래 ‘ムカヤウト’(向かやうと)로 되어 있어서 ‘-아/어 오(來)-’에 대한 번역이 빠져 있었다. 이것이 ‘~てまいる’(~て來る의 겸양어)를 보충한 ‘ムカヱテマイレト’(向かゑてまいれと)로 고쳐졌다. 또한 의 의미에 맞추어 ‘兩幹事’는 ‘兩間ノ事’로 수정되어 있다.

    또한 나카무라가 번역하지 못해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 의 일본어역에 대해서도 주서(朱書)로 각각 ‘若此薄待サセ’와 ‘復命スル面目ガナク’가 보충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어뿐만 아니라 일본어가 교정된 부분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초량관어학소의 첨삭 교육은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치밀하게 실시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15)어학소의 편문(編文)에 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여, 작문 혹은 강독으로 해석되고 있다. 동시대에 편찬된 「英吉利文典講義」(1886)에서 표제어 composition을 ‘編文’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통해 볼 때, 편문은 작문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16)「復文錄」에서 스미나가 조교에 의해 첨삭된 기사는 모두 3개조로서, (12a) 이외에도 [제57조] ‘五月二十三日 住永’<1:29a>와 [제133조] ‘十月二日 住先生’<2:11b>이 있다.

    5. 결론과 과제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 1873.10.1.~1880.4)의 조선어 교육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작문 교육에 복문(復文)을 도입한 점이다. 어학소의 복문 교육은 주로 조선어원문에 대한 일본어역문이 제시되면, 그것에 대응하는 조선어로 복원하는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초량관어학소의 어학생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가 작성한 「復文錄」에 수록된 148개조의 기사는 모두 복문 과제와 그 결과의 기록물로서, 본서를 통해 어학소에서 실시한 시험 및 평가 방식은 물론 오답에 대한 첨삭 내용까지 확인할 수 있다.

    감좌(監佐)는 복문의 결과를 원문과 대조하여 일차적으로 수정하였고, 이를 다시 교수에게 보내어 이차에 걸친 교정을 실시하였다. 첨삭 결과는 어학생에게 돌려졌으므로, 피드백(feedback)에 의한 첨삭 교육이 19세기말에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復文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선어교육에 있어서 시험과 평가, 첨삭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로서 인정된다.

    남은 과제는 우선 「復文錄」이 전거(典據)로 삼은 선행 문헌을 찾는 일이다. 전거서(典據書)를 통해 조선어원문과 일본어역문을 특정할 수 있다면, 본서에 수록된 복문 결과와 대조하는 과정을 통해 「復文錄」의 성립 과정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고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한 바와 같이 「復文錄」에 실린 조선어와 일본어의 어학적 검토도 중요한 과제이다. 첨삭은 조사, 어미의 교정과 함께 경어법, 문장 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 있었고, 실제 회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교정되었다고 생각된다. 차후 첨삭된 내용 전체를 대상으로 보다 상세한 검토가 요청된다.

    마지막으로 첨삭 전후의 언어를 비교하여 복문 교육의 효과를 검토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나카무라 쇼지로(中村庄次郞)의 예를 통해 볼 때, 어학소의 복문 교육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성과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초기 기록인 권1과 후기 기록인 권2의 첨삭 내용을 계량화하여 그 결과를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 검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의 문제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차후의 과제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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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1> ]  어학소의 교수진(「朝鮮事務書」의 辭令 참조)
    어학소의 교수진(「朝鮮事務書」의 辭令 참조)
  • [ <도판 1> ]  복문(復文) 과제의 원안과 탈초문
    복문(復文) 과제의 원안과 탈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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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2> ]  복문 교육의 개요
    복문 교육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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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판 2> ]  나카무라의 복문 결과([제17,18조])
    나카무라의 복문 결과([제17,1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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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표 3> ]  첨삭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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