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meaning of humanness in Sigurd F. Olson’s ecological aesthetics. The qualities of aesthetic appreciations of nature among human beings range from a primitive sensitivity to neighboring natural objects to a higher cognitive capacity to analyze the natural phenomena; whereas the same qualities among animals are presumed to converge on the intense primitive sensitivity to their surroundings. The different dimension of aesthetic appreciations between human beings and animals should not be views as the revelation of their dominance relationship in the wild nature. Rather, the commonality of their primitive aesthetic sensitivity serves as evidence for their ecological equality. The disinterested gaze in the wilderness often degrades natural things to the abject ‘other.’ Olson reinterprets disinterestedness in modern aesthetic theory through the lens of acentric environmentalism and aesthetic engagement. The true meaning of humanness starts from indulging oneself to the physical nature. The initial step of aesthetic experience is to mobilize one’s primitive sensitivity to feel the natural beauty; the second, to approximate to the universal order; and the last, to comprehend the right place of my identity in the universe. This change shows from the sharpening of affective ability to the development of cognition for environment. Olson thinks that anthropogenic activity in the uncharted nature is not always anthropocentric. To him, understanding the value of harmony and balance between nature experiences and philosophical meditation is crucial to the perception of human location in the physical nature.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Minnesota)주의 북쪽에 자리를 잡은 항구도시 덜루스(Duluth)에 들르면 슈피리어호(Lake Superior) 주변으로 지은지 수십 년이 지난 고풍스러운 맨션들을 볼 수 있다. 덜루스는 20세기 초중반에 미네소타의 철광석과 목재를 오대호 연안의 산업지대로 송출하면서 번성한 곳으로, 당시의 부자들은 호숫가에 이들 고택들을 지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로운 삶을 누렸지만, 이런 그림같은 풍광은 자연자원 개발로 인한 야생 자연의 상실로 인한 대가일 따름이었다.
20세기 환경운동가이자 자연기 작가인 올슨(Sigurd F. Olson, 1899~1982)은 이런 현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산업화 열풍 속에서 우거진 산림과 수많은 호수로 알려진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북부 일대의 야생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염려하면서 야생 자연 속에서의 심미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올슨은 쏘로우(Henry David Thoreau), 뮤어(John Muir), 버로우즈(John Burroughs), 레오폴드(Aldo Leopold)처럼 야생 자연에 관심을 기울인 생태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형성하였다. 그는 뮤어처럼 신이 만든 자연을 지키는 신성한 청지기의 사명을 되뇌면서 미국의 변경 체험을 통해 문명인이 잃어버린 활력을 회복하고 야생자연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중시하였다. 또한 그는 레오폴드처럼 대지의 윤리(land ethic)을 주창하며 자연의 본래적 가치를 내세우기도 했다.1) 올슨은 선대 생태사상가들의 진지한 야생 보전 노력에 자신만의 독창적 사유를 덧붙여 나갔다.
생태사상가로서 올슨이 지니는 독창성은 생태체험의 심미적 특질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생태사상의 심오한 차원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자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평이한 문체로 자신의 체험과 기존 문인들의 목소리를 담백하게 진술하는 올슨의 목소리는 이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신이 빚은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뮤어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유일신을 찬양하는 종교적 수사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범신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또한 20세기 후반의 심층생태학에서 강조하는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몸담은 지역의 자연을 체험하며 생태적 예지(ecosophy)를 얻는 것에 찬성하지만,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인간다움을 긍정하면서 문명의 이기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위와 같은 생태비평적 성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슨과 벌린트가『자연 환경의 심미성』(
1)Sigurd F. Olson, Reflections from the North Country (Minneapolis: U of Minnesota, 1998) 7. 이하 괄호 안 RNC와 숫자는 위의 도서 해당 페이지를 의미한다. 또한, 아래 도서의 인용 역시 괄호 안 SW과 숫자로 표기한다. Sigurd F. Olson, The Singing Wilderness (Minneapolis: U of Minnesota, 1998). 또한 에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본 논문에서는 두 책의 화자를 올슨과 동일하다고 간주한다.
올슨의 대표적 자연기로 꼽히는『노래하는 야생』은 사계절에 걸쳐 야생 자연을 경험하여 얻게 된 올슨의 인식 성장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자연 경험이 문명인의 닫힌 귀를 열리게 하여 생명의 연결 고리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파악하도록 이끄는 계기를 제공한다고 이해한다. 그는 무엇을 듣는지 비록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픔과 치유의 메시지를 감지하는 경험을 한다고 느낀다(
이처럼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는 화자에게서 자연 관찰과 정복을 시도한 백인 개척자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기도 한다. 여름에 카누를 타고 야생을 탐사하며 마치 19세기 초반 루이스와 클락 원정대(Lewis & Clark Expedition)에서 배를 들어 옮기는 고난한 여정 속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외부의 위협을 걱정하면서도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는다는 우쭐함에 고독을 즐기는 모습에 이런 점이 잘 묻어난다(
자연이 선사하는 즐거움은 나만의 완전한 야생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염탐꾼(voyageur)처럼 나만의 은밀 함을 즐기고자 고정불변의 야생 자연을 갈구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옛 사람들에게도 조용함이 사라진 것이 정령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화자는 과학적 탐구와 지식의 축적보다 야생 자연을 감성적으로 접근 하는 것을 통해 자연 물상의 상호의존성을 느끼는 것에 방점을 둔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과학이란 그저 자연의 질서를 짐작하는 것일 뿐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알지 못한다”(
위와 같은 올슨의 생각은 “자연적 환경 모델”(the natural environmental model)이라 불리는 자연 감상과 구분된다. 자연적 환경 모델은 크게 두 가지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상상의 힘을 과도하게 투사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자연과학의 지식과의 연관성 하에서 자연을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Carlson,
화자의 자연 체험은 자연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진다. 그는 덜루스 항구의 지저분한 모습과 깨끗한 입성을 한 숲 속 새들을 대조하면서, 문명이 인간 본성의 발현을 막았을 뿐 아니라 자연보다 지저분하기까지 하다고 토로한다 (
올슨의 시각에서 생태계의 보존은 인간성의 보존과 궤를 같이 한다. 화자는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숲의 냄새를 탐지하면서 단순히 자연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상들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문명은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 버렸으나, 숲으로 들어와 감각기관이 무장해제되면 나를 둘러싼 시공간과 맺고 있는 유대가 드러나게 된다. 즉, 자연을 알게 되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숲에서 감각기관을 열어놓으면 인간의 오르간 연주와 자연의 노랫소리가 합쳐진 나머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인간 속에 자연이 녹아들어 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고요한 야생 속에서 심미적 거리를 갖고 각각의 생명체가 땅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는 모습을 느끼는 작업은 자연과의 유대의식을 느끼도록 한다. 여기서 자연 속에 몸소 뛰어들면 이런 심미적 거리가 줄어들어 물아일체를 통한 내적 충만함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된다. 화자는 고적한 한밤중에 오로라가 비치는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땅에서 절연되어 움직임이 자유로워지는 것”(
화자는 얼음판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로라를 광자(proton)의 움직임이라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대에 귀신의 춤으로 설명하는 치페와사람들(Chippewas)의 설명방식이 여전히 통용되는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물리적 진실이 비실재적인 감각을 대체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오로라 불빛들이 북쪽에서 전달하는 감각이 중요한 것”이기에 과학적 진실은 “저 북쪽 불빛들은 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들의 일부”라는 느낌 자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과 자아의 거리, 소위 심미적 거리가 없어질 수는 없겠지만, 화자는 이를 최대한 좁히고자 자연 속에 뛰어들어 아름다움의 다양한 일면을 목도하고 자연과의 물아일체까지 경험한다. 이처럼 화자와 자연 사이의 거리가 최소화되면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위계도 희석된다. 이런 점은 무생명을 대하는 도덕적 태도를 중시하는 “비중심적 환경주의”(Acentric environmentalism)와 연결된다. “생명과 무생명을 구분짓는 어떤 도덕적 관계도 비중심주의 앞에서는 효용을 상실한다”는 표현에 잘 드러나듯이,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관점없음의 보편성”(non-perspectival universality) 을 내세우며 인간, 생명, 자연물상의 파편화에 반기를 든다(Godlovitch 135). “관점없음의 보편성”은 관점 자체의 부재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 사이의 우열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올슨은 ‘나’와 외부 대상의 상호침투성을 의식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관점을 버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것을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자연을 규정할 때 ‘불가해한 것’과 ‘인간과 다르다는 것’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즉, “자 연이 밑바닥을 측량할 수 없기에 궁극적으로 신비롭다는 생각, 그리고 자연이 ‘분류상으로 우리와 다른 것’인지라 ‘우리와 결코 한 부분이 아닌’ 무엇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빠져 나간다”(Budd 145)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 자체의 불가해성은 자연을 신비화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으며, 자연이 우리와 다르다는 인식 역시 타자화 논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인간적 관점은 언제라도 자연을 이해할 때 섞일 수 있으며,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비중심적 환경주의는 인간중심적 자연이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중심적 환경주의를 인간중심주의와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 말로 자연물상에 대한 타자화 논리와 공모한다고 볼 수 있다.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감지하는 자연 체험은 생태계 속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깨닫도록 한다(SW 192). 눈은 “질서, 평화, 그리고 단순함의 세계로 돌아가게 됨”(
올슨은 자연물상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하는 공존의 미학을 내세웠다. 이런 그의 사상이 지니는 의미는 자연 경험의 양태를 두 가지로 구분한 브래디(Emily Brady)의 견해와 관련지으면 명료하게 파악 가능하다. 브래디에 따르면, 숭고미(the sublime)는 심미적 가치에 귀속되는 것으로 우리를 거대 자연 앞에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면서 “크기와 힘”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양태인 경이로움은 크기와 상관없이 “두려움이 라기보다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하여 인간적인 것과 구분되는 무언가를 감지토록 하는 것이다(Brady 197-98). 위의 분류와 관련하여, 올슨의 자연 체험은 압도하는 자연 앞에 인간이 왜소해지는 체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후자에 가까운 듯 보인다.
공존의 미학 속에는 생명체들을 마주하는 것 이외에 혹한 속에서 고통을 겪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이해하고 담담하게 수용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다. “모든 형태의 생명은 이것[혹한의 고통을 견디고 죽음을 이겨내어 강자가 살아남아 봄에 새끼를 키우는 과정]을 준비하여 패닉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엄혹한 환경을 받아들였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 사이의 공존이라는 공시적 차원과 예전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이라는 통시적 차원을 모두 포괄 한다. 그는 이런 점을 오케스트라와 자연의 음악을 비교하는 아래의 언급을 통해 설명한다.
과거부터 그래왔던 “일종의 야생의 음악”은 화자의 심금을 자극하여 “이상한 느낌들이 내 안에서 고무”되는 체험을 하도록 유도한다(
야생 자연 속에서 동물은 단지 화자에게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객체가 아니라 공존하는 동료로 격상된다. 인간은 야생 자연이 위해를 가할 것이라고 의심을 품은 채 문명이라는 담을 쌓고 자연과의 교류를 차단하였으나, 이런 담이라고 해서 야생 자연과의 교류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갇혀 홀로 지내면 몸은 편할 수 있어도 ‘나’라는 존재의 본질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화자는 야생 체험을 할때 편안한 텐트를 버리고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통나무집을 선택한다. “이런 통나무집들에서는 야생이 언제라도 노래”(
화자는 더 나아가 공존의 범주 속에 비인간 생명체 이외에 암석과 같은 무생명체까지 포함시킨다. 무생명체의 특징은 문명의 흔적에 쉽게 지워질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자는 인류와 지구의 역사를 기록하는 무생명체의 생태적 가치에 주목하는 “지질학적 상상력”(geological imagination)을 발휘하고, 이는 앞에서 언급한 비중심적 환경주의와 연결된다.2)
이와 같은 논조로, 화자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들 아래의 지하 세계, 깨끗한 모래, 하얀 암석, 뱀장어처럼 일렁이는 풀잎의 일부인 듯”(
올슨이 보여준 지질학적 상상력은 ‘나’의 사적인 관심이 아니라 ‘내 안의 이성’에 입각한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한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심미적 사유는 칸트(Immanuel Kant)의 “사심없는 관심”(disinterested interest)으로 대변되는 서양의 근대 미학론과 연결된다. 칸트에 의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심없이 대하는 것은 “나의 관심이 아니라 내 안의 이성이 가지는 관심”을 뜻한다(Scrunton 24). 즉, 사심없는 즐거움은 안으로부터 솟아나는 즐거움의 일종으로, 특정한 의도를 갖고 “대상에 초점을 두며 사유에 의존”(Scrunton 25)하는 지적 유희의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은 객관화된 시선을 취하여 관조자의 입장에서 자연물상의 존재를 질서정연하게 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심미적 자연 체험은 관조자가 자신의 관점을 잊고 자연 속에 몰입하도록 한다. “자연계의 바로 이와 같은 ‘거기있음’(there-ness)은 내가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게 되어, 이제 하나의 유리한 시점으로부터 바라보고, 이제는 또 다른 시점을 취하고, 이제는 한방식으로 기술하며, 이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도록 하는 것이다”(Scrunton 60). 결국, 생태적 입장에서의 사심없음이란 관점의 사상 (死狀)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들의 인정・수용・종합인 것이다. 오히려 개체마다 품고 있는 상이한 관점이 다양하게 공존하지 못한다면 심미성의 이론적 기반은 빈약해진다(Carlson,
야생 자연 체험은 ‘고상한’ 심미적 담론은 얼음낚시와 사냥처럼 상이한 일차원적 기쁨을 매 순간 느끼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올슨은 마치 포식자라도 된 듯 얼음낚시를 하며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승리감을 만끽한다(
직접적인 야생 자연 체험을 강조하던 화자의 태도는 늑대들(timber wolves)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자 이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점은 마치 수백 년 전 식민지 시절에 청교도들이 “울부짖는 야생”(howling wilderness)이라고 숲을 규정한 것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 다. 화자가 본능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취한 전략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비록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녀석들이 화자를 관찰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인간을 제외한 대륙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문명의 울타리에 숨는 것이다(
화자가 어느 늑대와 근접한 거리에서 쳐다보며 눈싸움을 한 경험을 기술한 대목은 위의 두 가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위험한 순간을 넘기고 안락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는 통나무집으로 돌아와 밖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음악이라며 심미적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 시작한다. 늑대 여섯 마리가 비행기로 사냥을 당한 뉴스를 떠올리며 인간의 무지함으로 늑대의 씨가 마를 것이라고 걱정을 늘어놓는 것 속에서는 직전에 경험한 위험하면서도 움찔한 체험이 뒷전으로 밀려나있다. 그가 “우리는 오늘날 두려움없이 야생을 즐길 수 있다는 점, 포식자들이 자연 생태계 균형에 역할을 담당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야생 자연 체험 속에는 즐거움과 위험이 동시에 담겨있다. 화자는『 노래하는 야생』을 아래와 같이 끝내며 자연보호라는 대의를 내세워 후자를 교묘히 덮어버리는 듯하다.
화자가 안락한 침낭에서 “선을 넘지 말고 뛰노는 자연을 바라보라”는 쏘로우를 읽은 모습은 야생 자연 체험의 중요성에 관한 지금까지의 언급이 퇴보하는 것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그가 침낭 속에 웅크린 이유는 겉으로 야생 보호를 외치고 있지만 늑대와 신경전을 벌이며 경험한 움찔했던 느낌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쏘로우를 인용하며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에는 이런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렇듯 저자가 야생에 직접 뛰어드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 같은 인상을 풍기며 글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전 벨트가 사라진 놀이기구가 더 이상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하듯, 올슨은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심미적 감수성을 발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쉬(Roderick Frazier Nash) 또한 이를 두고 “올슨은 도시와 자동차와 내연기관의 경적소리 한 가운데에서 산 경험이 없었더라면 평온하게 지탱해주는 존재로서 야생의 매우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깨달았다”(Nash 245)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올슨은 섬세한 자연 관찰이라는 미덕을 보여주었음에도 철학적 묵상이 라는 ‘큰 깨달음’에 경도된 쏘로우의 엘리트적 자연감상이 범인들의 자연 체험과 괴리된 것임을 에둘러 비판하였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올슨은『노래하는 야생』을 통해 심미적 차원에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다움의 의미를 부단히 재인식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그의 생태사상은 인간 우월적 사고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비중심적 환경주의에 가깝다. 인간다움을 포함하여 올슨의 생태사상에서 심미적 체험이 지니는 의미는『북쪽 지방에서의 사색』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지질학적 상상력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아래의 논문에 제시되어 있다. 이동환. 「생명과 무생명의 경계: 미국 서부 자연기와 무생명의 생태학」. 『문학과 환경』 12.1 (2013): 105-32. 3)뮤어가 낭떠러지에서 아찔한 경험을 하는 대목은 아래의 두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나의 첫 여름』(My First Summer in the Sierra, 1911)에서 “나는 바위가 쪼개져 나를 밑으로 내던질 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니, 3천 피트가 넘게 떨어진다고!”(Muir 220)라며 두려워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캘리포니아 산맥』(The Mountains of California, 1894)에서 “내가 곧 떨어질게 틀림없다!”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이내 경탄하면서 “내가 감자기 새로운 느낌에 도취된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이다(Muir 355). 뮤어는 위의 두 군데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덕분에 두려움마저 극복하는 용기가 생겨 마침내 육신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고백한다.
3. 『북쪽 지방에서의 사색』: 심미적 생태주의의 형성
올슨의 후기작 중 하나인 이 글은 자연물상을 대하는 태도를 기술하는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는 점에서 그의 생태사상논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이란 생존을 위해 주변 사물을 수집하려는 욕망을 타고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와 방향성이다. 문명인의 수집 욕망은 음식을 얻는 것부터 문명의 이기와 예술품까지 다양하게 뻗쳐있다. 올슨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수집욕망의 핵심은 자연 속에 몰입하여 “영원한 자연 신호 수집가”가 되어 “항상 찾으려 하면서” 매 순간에 서로 다른 느낌을 받아 깨달음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다(
올슨이 생각하는 문명인의 문제점은 욕망의 획일화이다. 문명인은 재화를 소유하는 것에 매몰된 나머지, 자연의 다양한 신호를 감지하는 심미적 체험을 통해 자연의 보편성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상이 어떠한지 깨닫지 못한다. 대량생산된 재화에 파묻혀 감각의 단련이 이루 어지지 않았기에, 야생자연을 접하더라도 자연의 신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의 생태사상은 환경교육적 측면에서 시사점을 준다.
자연의 소리를 듣기 위한 첫 단계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정신과 육체의 복잡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속에 몰입하며 자연의 작은 소리까지 들으며 문명인의 기계적이면서도 분주했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느린 움직임의 일부”(
올슨은 작금의 백인과 달리 보이지 않는 원주민의 삶을 자연질서에더 가까이 다가선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상적인 미래를 원시적인 (primitive) 가치와 연관짓는다(
인간의 위대함은 인간다움을 제대로 갖추어 자신이 자연의 부분임을 이해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그렇기에 인간은 문명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태도, 즉 미지의 자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자기 내면의 신의 왕국을 깨닫기”(
올슨은 개별적 차원의 자연 체험을 통한 생태적 인식의 변화를 아래의 세 단계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심미적 만족을 느끼는 단계이다. 이단계는 자연 물상의 다양함을 매 순간 경험하며 정의적 영역의 내적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자연의 숨은 질서를 발견하여 인지적인 확장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특별한 개인의 심미적 경험이 쌓여 보편적 자연 이해로 확장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자신이 대자연 속에 독야청청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는 단계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일부라는 나름의 깨닫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체험을 머리에 저장한다. 올슨은 각각의 기억이 자연 속에서 나만 경험하는 내밀한 즐거움을 수반할 때라야 쓸모있게 활용가능하다고 이해 한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자연기인『노래하는 야생』(
올슨은 자연의 균형과 조화란 약육강식으로 드러나는 먹이사슬의 특정 국면이 아니라 생명 순환을 거시적으로 조망하고 자신도 그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신성한 불꽃은 온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인간의 인식은 위와 같은 우주질서를 이해하면서 고차원적 심미성에 입각한 자연 감상을 지향한다. 인간은 자연 물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모종의 규칙성(조화)을 감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개체들의 관계망으로 확장하여 조화로운 비전을 이해하고, 종국에는 우주의 본질적 가치를 포착하는 단계를 지향하면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올슨이 생각하는 고차원적 심미성은 근대 미학론에서 전제하는 인간의 주관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는 동물에게도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간중심적 심미주의가 아닌 생태적 심미주의를 내세운다.
올슨은 동물이 인간과 같은 인지 분석적 사유를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유전적 소질은 인간보다 오히려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본다. 이런 그의 생각은 생태비평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심미적 향유능력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면, 야생자연 속에서의 심미적 감지능력을 기준으로 하여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동일 선상에 놓이는 생태평등주의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차원적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야생자연의 다양한 물상을 인지적으로 분석하면서 우주 질서를 이해하는 고차원적 심미적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에, 동물은 자연 물상을 인지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할지라도 인간보다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차원적 심미적 감지능력을 매순간 강렬하게 느끼며 삶을 영위한다. 올슨은 위와 같은 인간과 동물이 지닌 심미성의 차이를 우열관계로 파악하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이 대자연 속에서 심미적 체험을 하는 순간만큼은 적어도 우열관계로부터 벗어나 생명체 사이의 평등관계(ecological equality)가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안락함 속에서 동물과 구분되는 고차원적 사유를 극대 화시켜왔다. 그러다 보니 야생자연에서 물리적 고통을 이겨내는 능력이 약해져 비대해진 인지능력과의 불균형이 심화되어 왔다. 올슨은 야생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를 억지로 참고 버티는 것으로 보지 않고 생명 순환 논리를 따르는 것이자 인간 본연의 일차원적 차원의 심미성을 체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핀란드인들이 불굴의 의지로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가려는 정신을 지칭하는 용어인 ‘시투’(situ)를 언급하 면서, 두려움없이 자연에 도전하며 사는 모습이야말로 인위적인 자연변형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심미성에 입각한 올슨의 생태주의는 심미성의 핵심을 주체와 객체의 거리로 이해하는 근대 미학론과 달리 이른바 “참여적인 심미성”(aesthetics of engagement)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참여적인 심미성이란 “자연계에 지속적으로 간여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대상 혹은 광경을 관조하며 감상하는 것[기존 미학론]을 대체하려는, 특별히 환경 미학과 제대로 통하도록 수정을 가한 미학 이론의 재구성”(Berleant 12) 을 의미한다. 물론 올슨의 심미적 생태주의도 인간다움의 개입을 인정하 다는 점에서 사심없음에 기반한 근대 미학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생각한 사심없음이 물리적 자연과 절연된 독야청청한 주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올슨은 인간이 자연물상과의 부단한 관계맺음 속에서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을 거친 끝에 인지적 차원에서 자연 질서를 감지하고 종국에 가서 생태적 차원에서 인간다움의 참의미를 깨닫는 것에 초점을 둔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주체를 통해 구현된다기보다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심미적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연 질서 속에서 자신이 지니는 위상을 파악할 때 달성 가능하 다. 이런 의미에서, 올슨은 근대 미학론에서 내세운 사심없음을 주체의 독립이 아니라 주체와 자연의 공존이라는 생태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생태적 심미주의에서 바라본 사심없음은 과학적 시선으로 물리적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사심없음은 사리사욕이 아니며, 자아는 육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는 육화되어 장소에 뿌리박고 있다. 이것이 생태적 심미주의이고, 생태계는 필수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니, 자아의 고향은 세계 속에 있으며, 나는 내가 머무는, 즉 나의 고향 터전 풍경과 더불어 규정된다. 이런 ‘관심’이 진정 나를 그곳의 통합성, 안정성, 아름다움을 보호하도록 이끄는 것이다”(Rolston 139). 생태적으로 유의미한 사심없음의 의미는 문명의 안락함에 매몰되지 않고 자연물 상과 관계를 맺으며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올슨이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란 각 생명체가 자연의 리듬에 몰입하여 각자의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의 신호를 감지하고 받아들여 자연의 일부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인은 자연 속에서 방종하게 행동할 수 없다(
올슨은 자연 체험을 통해 인간다움을 깨닫는 것에서 이상적 삶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야생자연 체험을 통해 “너 자신을 아는 것”(
이에 관한 해답은 올슨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생태적 의미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인간다움에 입각한 그의 생태사상은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적인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자연의 다양성과 마주하면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자연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문명의 문제 역시 구체적 물상에 대한 관심결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환경에 대한 책임을 사치스럽게 방기”(
올슨의 생태사상을 설명하는 명제 중 하나는 인지 정서적 요소의 균형감이다. 그는 레오폴드가 주창한 대지의 윤리에 필적할 “대지 사랑”(love of the land)을 제안한다(
염려와 관심을 갖고 대지의 훼손을 막는 것이 인지적 측면을 언급한 것이라면, 각각의 자연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의적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특정 장소와 얽힌 기억을 쌓아나가는 작업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 질서를 감지하는 단계로 나가게 된다. 그 결과 자연 질서의 안정성을 깨달아 가면서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실감하게 된다. 올슨은 이를 두고 “떠오르는 신”(an emergent god)라 명명한다. 이 말은 우상숭배 차원이 아니라 매순간 감지하는 자연의 조화로운 비전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올슨이 볼 때, 인간이 자연의 조화를 탐색하는 이유는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갈망”(
4)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의 논의를 참고한다. 이동환, 「실용적인 수자원 활용과 지역생태의 지속성: 매리 오스틴의 『갈수(渴水)의 땅』과 물의 순환」, 『문학과 환경』 9.1 (2010) 14-15. 5)“인식의 지도그리기”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저술을 참고한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NC: Duke UP, 1991); Fredric Jameson, Signatures of the Visible (NY: Routlede, 1992): 54. 6)포터는 다음 저서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이 미국적 성격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언급한다. David M. Potter, People of Plenty (Chicago: The U of Chicago P, 1954).
자연의 심미성에 대한 논의는, 어쩌면 모튼(Timothy Morton)의 주장처럼, 근대 낭만주의 시기 지식인들의 언어 유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상정하여 이를 상상적 비전으로 통합시키는 이른바 ‘병주고 약주기’ 전략을 구사하여 “생태비평적 호들갑”(ecocritical fuss)을 떨면서 정작 물리적 자연으로부터는 멀어졌다는 것이다(Morton 22-23). 모튼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다운”(natural)이라는 표현에 얽힌 관념들을 제거 하고 일종의 “심미성에 반(反)하는 전략”(anti-aesthetic strategy)을 구사해야 된다고 본다(Morton 24-25). 그는 심미성이야말로 “바로 이 장소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방식들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하면서 낭만주의로부터 작금의 심층생태학까지 이어졌다고 이해한다(Morton 2). 그러나 모튼의 주장을 받아들일지라도, 심미적 가치와 분리된 자연이 물리적 실체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이 물리적 자연을 경험함에 있어서, “신체의 역사성”(the historicity of the body)을 감안한다면 심미적 프레임의 개입없이 자연 물상을 오롯이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마음과 몸의 이분법이 인간의 주체 성을 ‘전체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관련하여 더 이상 축출할 수 있는 환상이 아님”(Rigby 142)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자연에 몰입하여 아름다움을 느끼고 읽어내어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는 가운데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다움의 발양은 생태적인 것과 대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흔적이 제거된 자연이야 말로 추상화된 자연과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이 지니는 의미는 비중심적 생태주의에 입각한 심미적 감수성 논의 속에서 인간다움이 지니는 여러 가지 의미를 조망한다는 점에 있다.
올슨은『노래하는 야생』에서 홀로 야생 자연에서 호젓하게 머물려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몸소 자연의 질서를 체득하고자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태도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생태적 사유는 심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연을 편안하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연 속에 뛰어들어 아름다움의 다양한 일면을 목도하면서 종국에 가서 자연과의 물아일체적 경험까지 지향한다. 이런 가운데 그는 물리적 자연 속에 인간 이외에 비인간 생명체, 더 나아가 암석과 같은 무생명체의 흔적까지도 담겨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북쪽 지방에서의 사색』에서는 올슨이 생각하는 야생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이 생물학적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욕망 자체와 같은 인간다움이 생태문제를 일으키는 핵심이라 여기지 않는다. 심미적 가치는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생겨난 것(anthropogenic)이지만 이것이 모두 인간중심적인 것(anthropocentric)은 아니다. 올슨은 인간이 문명 속에서 길들여져 가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주목하였다. 건강한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야생 자연을 체험하면서 자연의 질서와 이에 입각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며, 이와 같은 감수성 계발은 생태적인 사유와 대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올슨의 생태사상은 학술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퀘티코-슈피리어 일대의 야생 자연 보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노래하는 야생』이 1950년대에 상당한 인기를 얻자 농림부 장관인 프리먼(Orville L. Freeman)이 훈령을 내려 유례없는 야생 자연 보호가 가능토록 했을 정도였다(Nash 209). 이처럼 그의 생태사상은 심미성에 천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환경보호 실천이라는 윤리적 차원까지 걸쳐 있다.